미셸 오바마는 왜

첫 복직 후 오랜만에 만난 취재원은 내게 물었다.

“근데 애는 누가 봐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의 질문이라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양육의 무게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짊어지고 있냐. 둘째, (엄마가 나와있는데) 애는 누가 보냐. 사실 후자는 교양 있는 현대사회인들의 대화에서 직설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것이 그만큼 이 대화의 기저에 깔려있음을 알고 있다. 이 질문은 대개 여자, 직장을 다니는 엄마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직한 뒤 친정부모님도 내게 몇 번 말했다.

“애들이 엄마가 있으면 표정이 다르다.”
“(엄마가 매일 집에 늦게 오니) 애들이 안 됐다, 불쌍하다.”

얼마 전에는 “은우 아빠 아니면 너 일도 못했어”란 얘기도 들었다. 이 모든 말들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49%만큼만 동의할 수밖에 없다. 49%가 50%로 변하는 순간부터 절박해질테고, 죄책감과 불완전함의 무게에 짓눌릴 테니까.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어쩔 수 없다’라며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전술을 택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이 방법은 완전하지 않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숨이 턱 막히거나 다 때려치고 싶다는 날것의 감정이 꿈틀거리는 시간거지의 일상. 그 속에서 나는 언제까지 49% 저지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수시로 자문한다. 그러다 문득 반발짝이라도 앞서간 이들의 서사가 궁금해졌다.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은 이 혼돈과 궁금증에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일단, 잘 썼다. 서문을 읽어가며 깜짝 놀랐을 정도로 미셸 오바마는 자신의 삶을 유려하고 단단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문장들로 서술했다. “새 베개 위에 다른 머리들이 눕는다. 다른 성품과 다른 꿈이 눕는다”는 말로 백악관을 떠나는 날을 묘사한 솜씨에 그만 반해버렸다.

미셸 오바마의 삶은 ‘오바마’란 세 글자 이상이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노력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던 그는 ‘청자’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도 그 ‘노력의 소리’를 내며 성장했다. 의지와 무관하게 점점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매일 출근하던 아버지, 늘 곁을 지켜주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어머니는 그에게 가능성을 쥐여주려고 했다. 미셸 오바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새롭게, 더 많이 획득하려 했다. 성취해냈다. 그런 삶은 빛날 수밖에 없다.

모든 순간이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이 책에는 미셸 로빈슨이 ‘넌 안 될 거야’라는 교사의 혹평을 듣는 순간도, 미셸 오바마가 처절한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리던 장면도, 아슬아슬하게 칼 끝에 선 심정으로 남편과 부부상담을 받던 시절도 솔직하게 담겨있다. 미셸 오바마는 버락 오바마의 멋진 미소와 뜨거운 열정에 가려진 가족, 가사, 육아문제도 빼놓지 않는다.

272쪽)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사샤와 말리아가 눈이 자꾸 감겨서, 안아다 침대에 뉘어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면 내 눈이 자꾸 감기고 식탁에 촛농이 흥건해질 때까지, 차츰 기분이 상하는 채로 배를 곯고 기다렸다. 사실 버락의 “가는 중이야”는 그의 영원한 낙천성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것은 어서 집에 오고 싶은 그의 마음을 표현한 말일 뿐, 실제 도착 시각과는 무관했다.

281쪽) 일은 재미있고 보람찼다. 그래도 일에 에너지를 몽땅 쏟지는 않도록 주의했다. 아이들 몫을 남겨두어야 했다. 버락의 정치 경력을 용인한 뒤로 나는 내 일에 들이는 노력을 좀 줄였다.

286쪽) 내가 썩 내키지 않아도 우리 삶에서 자리를 조금 양보해주고 공존하며 살아가야 했던 것이 바로 그의 비전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울컥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버락에게서 결코 없앨 수 없는 부분이었다.

– <비커밍> 중에서

그런데 왜 미셸 오바마는 셰릴 샌드버그의 <린 인>을 혹평했을까?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들은 얘기를,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안고 갔다.

‘린 인’이라는 말은 여성들에게 좀더 일에 욕심을 갖고 뛰어들라는 당부다. 셰릴 샌드버그는 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일터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공간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봐도, 위를 쳐다봐도 남성이 많다. 그들은 대개 권한을 쥐고 있다. 셰릴 샌드버그는 이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며 ‘서류 가방을 든 나쁜 엄마’란 이미지를 벗어던지라고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이 맞춰진다면, 굳이 혼자 쓰러지지 않으려 아등바등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여성이 ‘정상’에 선 것이 엄청난 성취가 아니라 ‘그냥 그런가보다’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해빠진 일이 될 때, 여성들은 여성이라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셰릴 샌드버그는 이 문제를 어떤 제도나 문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성들이 두려워말고 더 많이 ‘린 인’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개인의 노오력을 강조했다고 비판받은 이유다.

그런데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부딪치지 않으면 돌파 여부 자체를 알 수 없다. 침묵과 부동의 자세만 유지한다면 무엇이든 그대로다. 하늘에서 잘 익은 감이 뚝 떨어지는 일조차 드물다지 않은가.

218쪽) 나는 여태껏 일하면서 여성을 직속상사로 둔 적이 없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 나보다 직위가 더 높은 여성은 있었지만, 그들이 성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살펴볼 만큼 사이가 가깝지 않았다. … 우리 여성은 그렇게 조직에 맞추어갔고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이유가 없었다.

254쪽)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오는 아버지가 늘어나고, 직장에서 일하느라 바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더욱 많은 선택사항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여성 리더들이 불평등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정책은 바뀔 것이다. 나의 요청으로 구글에는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이 생겼고, 내가 퇴직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여성은 천장뿐만 아니라 바닥도 뚫어야 한다.

– <린 인> 중에서

미셸 오바마 역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괴로워한 ‘직장맘’이었다. 결국 더 포기하는 쪽은 버락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일을 지켜갔다. 생후 3개월된 아이를 안고 면접을 보고, 파트타임을 할 때도 있고, 아이들의 끼니를 패스트푸드 등으로 때울 때도 많았다. 영양잡힌 식사를 위해 셰프를 고용하긴 했지만.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을 만든 셰릴 샌드버드나, 아기를 데리고 면접을 본 미셸 오바마나 원하는 바는 같았다. ‘나를 지키자.’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은 나란 사람을 채워주는 요소며 나의 상황일 뿐 나의 전부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의 총합인 나는 당신들과 함께 일하고, 걷는 사람이다. 이 온당함을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각자의 방법을 찾아냈다. 많은 여성들이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 또한 그 중 하나다. 며칠에 걸쳐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역시 내가 나름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아직 “우리는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속 발전하는 방향으로 발을 내디뎌야(<비커밍>, 545쪽)” 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미셸 오바마는 미셸오바마대로, 셰릴 샌드버그는 셰릴 샌드버그대로, 나는 나대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저마다의 정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은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