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태 기획설? 재판관들은 꿈쩍 안했다

[분석] 결정문 곳곳에 드러난 대통령 향한 불신… 실패만 낳은 그들의 전략

▲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 선고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판결문을 읽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10일 헌법재판소가 공개한 대통령 파면 결정문은 보충의견을 포함해 모두 89페이지에 이른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표현대로 “역사의 법정 앞에 서게 된 당사자”가 된 재판관들은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린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많은 말들은 한 마디로 모아진다.

헌법재판관 8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믿지 못했다.

‘모른다’던 박근혜의 말, 헌재가 믿지 않은 이유

박 전 대통령은 측근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 전반을 두고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지난 1월 25일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 ‘정규재TV’에 출연해 “최씨는 오랜 시간 알아왔고 저 혼자 지내니까 충실히 도와준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내가 몰랐던 일들이 많았구나 했다”며 “잘 몰랐던 불찰에 마음이 많이 상하고 있다”고 했다. 또 자신과 최씨가 ‘경제공동체’로 얽혀있다는 주장은 “엮어도 너무 억지로 엮은 것”이라고 말했다(관련 기사 : 박근혜 “‘세월호 7시간’ 캐묻는 건 여성비하”).

하지만 헌법재판관들은 “믿기 어렵다”고 했다. 이들은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될 때까지 연설문 등에 관한 의견만 들었다’는 박 전 대통령의 주장부터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사람의 연락책 역할을 한 정호성 전 청와대비서관이 2013년 1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청와대 문건 47건을 최씨에게 전달한 혐의로 이미 재판을 받는 중이고,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재단법인 미르와 K스포츠 설립 논의를 진행한 것도 2015년 2월~2016년 1월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씨가 해외순방 일정을 상세히 알고 박 전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으며 일부는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이 사실을 언급하며 “관련 문건이나 정보가 최순실(기자 주- 결정문에는 바뀐 이름 최서원으로 기재)에게 전달된 사실을 피청구인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인사 관련 자료나 정책보고서 등을 최씨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주장도 불신했다.

순수한 취지라면서 비밀리에… “납득할 수 없다”

▲ “박근혜 방 빼!” 탄핵인용 축하행진 10일 오전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만장일치’로 인용한 가운데, 안국역 부근에서 탄핵선고를 지켜본 시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축하행진을 하고 있다. ⓒ 권우성

탄핵 사유의 핵심근거인 미르·K스포츠재단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문화 융성과 경제 발전이라는 순수한 취지로 두 재단을 세웠다고 말해왔다. 또 자신은 기업의 출연 과정이나 법인 운영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그렇다면 ▲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국경제인연합회(아래 전경련) 관계자와 재단 설립을 논의하며 청와대 개입사실을 비밀로 해달라 요청하고 ▲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뒤 안 전 수석이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에게 증거 인멸과 위증을 지시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최순실씨가 자신을 이용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 줄 몰랐다는 박 전 대통령의 ‘결백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헌재는 2016년 1월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그랜드코리아레저 관계자를 만나 스포츠팀을 창단하고, 최씨의 회사 더블루K가 운영 자문 등을 하도록 소개하라고 지시한 점을 반례로 들었다. 만들어진 지 한 달도 안 된데다 대표이사까지 모두 3명이 일하는 더블루K를 ‘우수 중소기업’으로 알고 지원했다는 박 전 대통령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이 회심의 무기로 제시했던 ‘고영태 기획설’ 역시 재판관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다. 이들은 고영태 전 더블루K 상무가 최순실씨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번 사건을 기획했다고 말해왔다. 2월 14일 열린 13차 변론 때는 이 가설을 입증하겠다며 김수현 전 고원기획 대표가 고 전 상무등과 대화한 내용을 녹음한 파일 2000개를 증거로 채택해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 대통령 쪽 지연작전, 효과 없고 면박만).

작전 실패 “고영태는 탄핵심판 판단과 상관없다”

10일 헌재는 ‘고영태 기획설’은 탄핵심판의 본질과 무관하다며 선을 그었다. 재판관들은 “최순실의 동기가 무엇인지 여부는 피청구인(대통령)의 법적 책임을 묻는 데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잘랐다. “최순실이 고영태 등에게 속거나 협박을 당했는지 여부는 이 사건 판단과 상관이 없다”는 말도 남겼다. 국정농단 의혹을 두고 “우발적으로 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정규재TV 인터뷰)”던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무색하게 만드는 결론이었다.

재판관들은 ‘진실하지 않은 대통령’을 거듭 비판했다. 이들은 “피청구인은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담화에서 국민에게 사과했으나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기간과 내용은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진정성이 부족했다”고 봤다. 2차 대국민담화에서 진상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고선 검찰과 특검 수사에 응하지 않은 일 역시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판단은 파면 결정으로 이어졌다. 반전을 꾀했던 박 전 대통령과 대리인단의 전략은 어느 하나 재판관들의 머리와 가슴을 움직이지 못했다. ‘몰라요’로 일관했던 박 전 대통령의 태도는 그들의 불신만 샀을 뿐이었다.

▲ 청와대앞 ‘박근혜 구속’ 퍼포먼스 10일 오전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만장일치’로 인용한 가운데, 대학생들이 청와대앞 청운효자주민센터앞에서 ‘8:0’ 만장일치 탄핵인용을 환영하며 ‘박근혜 구속’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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