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해야 기억한다

“지치죠… 그래도 행복해지려고 싸운다”

2015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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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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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이 ‘언행일치’다. 말을 내뱉기는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 결국 비겁해진다. 침묵을 택한다. 

그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세상이지만, 드문드문 우리는 다른 사람도 본다. 권영국 변호사는 그 ‘다른 이’ 중 하나다. 몇 년 전 쌍용차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당직 취재를 갔다. 정말이지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기사를 쓰려면 사람들의 말을 받아적어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펴기도 힘들었다. 그때 참가자들 맨 앞줄에서 권영국 변호사를 봤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그는, 1시간여짜리 행진 참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날의 집회가 남다른 것은 아니었다. 권 변호사는 온갖 집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경찰에 항의하다가 멱살 잡혀 끌려가고, 몇 번이나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던 ‘이상한 변호사’다. 요즘에는 재판도 받고 있다. 가끔 ‘저분은 왜 저렇게 싸울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로 나선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8월 21일 권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기사로는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아쉬워 블로그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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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대한문 집회에서 경찰관 폭행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12년 5월 10일 청운동 집회 일반교통방해죄랑 2014년 7월 20일 세월호 집회 때 경찰관에게 욕설한 것(모욕죄)은 유죄가 인정돼서 벌금 300만 원이 나오긴 했다.

“예상했다. 그래도 청운동 집회를 제외하면 일반교통방해죄는 오히려 (예상보다) 더 무죄가 나왔다. 지금 법원이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는 경향이 엄격해지고 있다. 단순히 거기(도로, 인도 등)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신고한 집회에서 단순 참가자가 사람들을 따라가다가 일반 차로까지 넘어간 경우까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은가.”

– 핵심 쟁점이 무죄여도 일부 유죄니 항소할 생각인가. 검찰이야 당연히 할 텐데.

“검찰이 하면 저도 항소해서 다퉈보려고 한다. 일반교통방해죄는 (당시 교통상황이) 완전히 불통이냐, 현저히 불통이냐에 따라 (유무죄 인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청운동 집회의 경우 당시 경찰이 우리를 에워쌌지만, 다른 한쪽 길은 열려있어서 자동차들도 왔다 갔다 했다. 

또 하나, 모욕죄는 판결문에 ‘집회 해산명령절차가 위법할 여지가 있다’고 나온다. 하지만 항의 수단(경찰관에게 욕설)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방법이 가능한지… 제가 처음에는 ‘여기 지금 불법행위가 어디 있느냐, 불법행위가 있다는 방송을 중단하라’고 몇 번씩 요구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법정에 증거로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제가 항의 장면을 채증한 동영상이 분명히 있을 텐데… 왜냐면 그때 우리가 확인한 (경찰) 캠코더만 서너 대였다. (경찰관) 증인신문 때도 확인했다. 

재판부도 제 불법행위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공권력 남용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욕할 수야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몇 번 얘기를 했지만, 계속 경찰이 ‘불법집회를 중단하라’고 들이대니까 열 받아서 ‘야, 이 개새끼야’ 한 거다. 여기서 다른 어떤 수단이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먼저 때려야 하나, 아니면 마이크를 뺏어야 하나? 실제 현장에서 공권력의 남용으로 침해받을 때, ‘말’로 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대응이잖아요. 그거 말고 어떤 방법을? 정말 답답하더라. 현장에서 꾹 참다가 소송 제기하라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

– 그런데 이번 재판뿐 아니라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옥쇄파업 때 경찰의 조합원 체포에 항의하다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기소돼 2심까지 줄곧 무죄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변호인이 아닌 피고인으로 재판받는 심정은 어떤지 궁금하다.

“진짜로 (제 자신이) 피고인으로 느껴진다. 변호인은 어쨌든 검찰이나 판사를 대할 때 직업적으로 대등하게 느끼는데 피고인으로 가면 말할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진다. ‘변호인 권영국’은 하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하는 편이고, 검사나 재판부에 이의제기도 강하게 한다. ‘피고인 권영국’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당사자라, 제 태도에 따라 재판부가 어떤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됐다. 말이나 행동도 상당히 조심스러워지더라. 우리 변호인들이야, 제가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데(웃음). 항상 사후적으로 말하게 되더라. 변호인들이 먼저 다 말하고 나면 당사자로서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거죠. 절차 진행에 개입하기도 어렵고, 함부로 법리 얘기를 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재판부 눈에) 건방지게 보일 것 같아서. “

– 아무튼 현직 변호사가 또 재판을 받는데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이 무더기로 기소됐다는 점에서 유명한 사건이었다. 재판과정에서 특별했던 장면을 꼽는다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재판 처음 시작할 때 법정을 가득 메웠던 변호사들, 그게 기억난다. 재판장이 조금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편으론 무척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사람들이) 의리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정말 뿌듯했다(웃음).

중간에 불쾌했던 것도 있었다. 상대방이 검사잖아요. 근데 사실 나이로든 뭐든 후배인데, 이름을 부르는 거야. ‘권영국 피고인’도 아니고 ‘피고인 권영국’이에요. 속으론 ‘맞먹자는 건가’ 싶더라(웃음). 무죄추정원칙에 따르면 평어를 써야 한다. ‘권영국’이라고 부르는 건 잘못 쓰는 거다. 최소한 ‘권영국 피고인’이라고 하든가, 그냥 피고인이라고 해도 충분했는데. 하여튼 굉장히 불편했다.

또 하나는… 연정훈 당시 남대문서장이 세 번이나 출석 요구를 받았는데도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굉장히 화가 났다. 사건 당시 가장 높은 현장책임자로, 실제 (관련) 결정을 했던 사람이고, 자기가 집회를 다 관리하는 입장이었는데 법정에서 이러저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출석 사유가 ‘집회가 너무 많다’였다. 기일이 다 월요일이고, 낮이었는데. 이럴 때는 집회가 없다. 공무원들이 권한 행사할 때는 남용하면서 그 법적 책임에는 굉장히 무책임하다.”

– 동료 변호사들이 너도나도 선임계를 낸 일은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부분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난 4월에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로) 검찰이 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됐는데, 그때는 좀 (멋쩍어하며)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기간에 연행된 다음 체포적부심(체포의 적법성 등을 법원이 심사하는 것)을 받았을 때랑 2013년 7월 25일 대한문 집회 때문에 영장이 청구됐을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책임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괜찮다고 여겼는데… 세월호 집회로 다시 한 번 구속영장이 청구됐을 때는 미안했다.”

– 또 구속영장이 청구될 일은 없을까?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가면 괜찮을 텐데… 비정상적인 경향이 강해질수록 갈등이 불가피하게 높아지잖아요? 그러면 소위 인권변호사라는 사람들은 계속 인권옹호활동을 해야 할 테고, 그 갈등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 재판도 재판이지만, 검찰이 민변 변호사들을 무더기로 기소하면서 대한변협에 징계 개시 신청까지 해서 화제였다. ‘민변 표적 수사’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공안검찰이 민변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를 여러 가지로 한 것 아닐까. 대한문 집회 무더기 기소가 있고, 기소되지 않은 변호사들의 진술거부권 권유까지 트집 잡아 징계 개시 신청을 하고, 이후에도 과거사 사건 수임 관련해서… 물론 그것은 좀 판단이 갈릴 수 있는데, 어쨌든 민변에서 대리하지 않고 회원들이 각자 사건을 수임했는데, 그걸로 민변을 공격했다. 이런 일들을 보면 민변의 사회적 신뢰도에 흠집을 내고, 운신의 폭을 좁히려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저만 해도 이번에 여러 사건이 섞여서 기소됐는데, 그러면 (핵심은) 물타기가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일 중요한 대목은 ‘경찰이 집회의 자유를 침해했느냐, 아니면 우리가 공권력에 도전했느냐’였다. 그런데 여기에 일반교통방해죄, 모욕죄 등이 섞이니 어떤 기자는 20일 판결을 ‘경찰관 폭행 권영국 변호사 벌금 300만 원’이라고 썼더라. 유죄 나온 혐의는 폭행도 아닌데. 그래서 (핵심 쟁점이 무죄가 나왔음에도) 뒷맛은 굉장히 씁쓸했다.”

지난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에서 해산 결정에 항의하며 소리를 외치던 권영국 변호사가 입이 틀어막힌 채 끌려나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 그런데 ‘피고인 권영국’ 재판이 더 있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 때 소리를 질러서 법정소란죄 혐의로 기소됐는데,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나.

“갑자기 선고일이 잡혔다는 소식에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예상했다. 하지만 전날까지는 (직접 보러갈) 생각이 없었다가 당일 아침 갑자기 ‘오늘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더라. 솔직히 진보당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네 생각에 동의하진 못해도, 그 생각 때문에 탄압받으면 같이 싸우겠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또 헌법재판소가 정말 반역사적인 선고를 한다면, 누군가는 법정 안에서 ‘당신들은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다.”

– 선고를 보려면 방청권이 있어야 했다. 미리 나눠줘서 당일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언론 보도로 방청권이 필요하다는 건 알았는데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니까 무조건 간 거죠. 또 변호사라 둘러댈 말이 있으니까 그걸 믿었다. 실제로 중간에 여러 번 검문 당했는데, 교묘히 빠져나갔다(웃음). 제 자리에 방청석 번호가 있는데도 제가 먼저 앉아있는 걸 보고 다른 사람이 안 들어왔는지 계속 그 좌석에 앉아 있었다.”

– 정확히 어느 시점에 일어났나. 마이크는 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 앞에만 놓여있어서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야 소리 지른 걸 알았다.

“(재판관 의견이) 8대 1이라는 설명이 나왔을 때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 넓은 심판정은 조용하고, 재판관들 앉은 곳은 높고. (마음을 먹었어도)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진짜 그날 성호를 몇 번 그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어났는데, 방호원이 와서 앉히더라. 나중에 (박 소장이) 주문을 다 읽고 ‘마치겠습니다’ 말할 시점이 됐다. 그때는 지금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나서 소리쳤다.

제가 쌍용차 정리해고 취소소송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될 때 열패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아무 얘기도 못하다 조용히 나와야 하잖아요. 나와서야 울고. 그것도 굉장히 화났다. 또 (대법관들에게) 나중에 잘못했다고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해줘야 하는데… 정당해산심판 때는 꼭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일반인들은 법정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고, 변호사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없잖아요? ‘분명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란 얘기를 꼭 해야겠다 싶었다.”

– 어쨌든 자꾸 기소당하고, 체포당하는 모습을 보면 꼭 수사기관에 단단히 찍힌 것처럼 보인다. 만약 유죄가 확정되면 변호사 일에도 지장이 있을 텐데, 그런 두려움은 없는가. 

“정작 저는 별로 그런 걱정을 안 했다(웃음). 원래 법대 출신이 아니니까, 변호사가 천직이라는 생각까진 안 든다.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야 매우 강하게 갖고 있지만. 그런데 의뢰인들이 걱정하더라. ‘변호사님, 계속 그렇게 하면 사건 제대로 진행할 수 있겠어요?’라고 질문하는 분도 있다. 그럼 미안하죠. (의뢰인들이) 불안할 수 있다. ‘저 양반을 어떻게 믿지?’하는 불안감 있죠(웃음). 그런데 또 ‘변호사님 용기내십시오’라는 분들이 더 많다.”

–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이 마음먹기 따라 얼마든지 화려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사서 고생’하는 것 같다. 또 노동현장은 가장 치열하고, 거친 곳 아닌가. 계속 거기 있다면 사람이 지칠 법도 한데.

“이제는 지치죠. 왜냐면, 자꾸 후퇴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져야 하는데 10년 가까이 계속 후퇴만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계속 이렇게 가면 어떤(눈을 감으며) 가치나 방향성을 잃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적인 예가 세월호 유족을 비하하는 현상이다. 또 법원 판결이나 한국사 교과서 등으로 독재를 미화하고 거기에 면죄부를 주는 일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굉장히 위험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절망한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한 일들이 한 순간에 다 뒤엎어졌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것이 돈 앞에선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다.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한다. 저 역시 심리적으로 좀 지친다.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쳤고.”

– 그런 사회의 흐름에 법은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는가.

“저는 약간 반인반수라고 해야 하나? (웃음) 반은 법률가이고, 반은 일반 시민이다. 물론 직업이 변호사이긴 한데, 직업적 굴레에 갇히지 않겠다는 생각도 강하다. 그래서 현재 존재하는 법이 어떻게 제대로 집행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금 법이 갖는 한계를 굉장히 많이 느낀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그것은 결국 사회 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느냐의 문제다. 법과 시민의 권리, 이 두 가지가 결국 우리 사회를 더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만든다. 

저는 그런 얘기도 한다. ‘악법을 꼭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잘못된 건 바꿔야지, 왜 노예가 되려고 하느냐는 거다. 그래서 법이든, 시민의 권리든, 우리의 방향성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어떻게 더 높여갈 것이냐 하는 데에 있다. 소수집단의 전횡을 어떻게 견제하고 권력 자체를 분산시켜 우리가 생각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성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라고 본다.

2002년 연수원 수료하고 민주노총 법률원 만들 때에는 노동운동의 한 축으로 법률투쟁이 결합하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결국 사법부도 사람이 하는 거다. 법전이 스스로 알아서 해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해석하는 일이다. 우리는 대법관 또는 재판부 구성에 따라 (재판의) 결론이 달라진다고 피부로 느끼지 않나. 사람들은 복잡한 법 논리는 모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정치적인 판결이라는 것을 그냥 느낌으로 한다. 

어떻게 보면 사법부의 구성 자체가 매우 편향적이라 공정한 재판을 담보할 수 없는 거다. 우리가 법원을 인권의 최후 보루라고 하잖아요? 그건 그 일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나왔다. 또 헌법에는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 양심이 공정할까? 객관적일까? 그걸 봐야 한다. 이미 이 사람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사실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는 것이 오히려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법원의 구성과 체계 자체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법원이 어떤 기준을 만들어준다는 것 자체가 틀린 말이 된다.

저는 예전에도 법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사회에서 제일 좋은 일은, 당사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성숙한 사회죠. 그 나라의 수준을 만드는 것은 결국 시민 의식이다.”

– 주로 노동사건을 도맡아 하니까… 자꾸 재판까지 받아서 가족들이 싫어하진 않나.

“노동사건이 힘든 건 맞다. 기록이 두껍고, 돈도 많이 안 되죠. 가족들은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서…(말끝을 흐리며)… 걱정하죠(두 눈을 감고 머리를 긁적임)… ‘좋은 뜻으로 하는데 혹시나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하냐.’ 그럼 저는 ‘걱정된다고 쫄아서 안 하면 더 웃기지 않냐’고 말한다. 자녀들은… 글쎄… (목소리가 작아지며) 이해를 못하겠죠. 아이들 입장에서는 ‘왜 꼭 저렇게 힘들게 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안한 부분이 있죠.”

ⓒ 권우성

– 그럼에도 계속 똑같은 길을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인터뷰에선 풍산금속 재직시절 안강공장에서 노조를 만들 때 동료들에게 ‘배신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던데.

“그런 약속들이 중간 중간에 계속 제 발목을 잡은 측면이 있다(웃음). 안강에선 ‘내가 너를 어떻게 믿냐’는 질문을 받았고, ‘당신이 가라고 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2006년에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조가 11개월 정도 파업을 했다. 대학 노조 가운데 제일 조직력이 탄탄한 곳이었는데, 총장이 단체협약을 해지하는 등 노조를 완전히 흔들고 있었다. 파업한 지 4~5개월 됐을 때였던가… 이미 조합원들 생계는 바닥났고, 다들 힘들어하던 시기였는데 노조에서 와서 힘주는 얘기 좀 해달라더라. 그때 그랬다. ‘여러분이 동료를 배신하지 않고, 서로 믿고 계속 싸울 수 있다면 제가 변호사로 있는 한 사용자를 대리하지 않겠다’고. 바로 후회했죠. 그래서 마이크에 대고 ‘하아, 여러분 그런데 제가 정말 후회스러운 약속을 했다’고 말했다(웃음). 실제로 그 원칙을 지금까지 지켜왔다.

지금은 이런 거예요. ‘우리가 상식적이지 않은 사회로 돌아왔다.’ 대통령만 봐도 법 위에 존재한다. 소통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정책이 기존에 있는 것들을 다 뒤엎고, 본인이 했던 최소한의 약속까지 다 깨잖아요. 사람들은 점점 더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드냐면… ‘이 몰상식한 현실이 존재하는 한 내 삶도 행복하지 않겠다. 내 삶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려면 이 현실을 (제 자리로) 되돌려놔야겠다.’ 이 생각이 점점 커져요.”

– 그렇게 빠지는 집회 없고, 노동 현장 곳곳에 나타나니까 별명도 ‘거리의 변호사’다.

“그렇게 호칭해주니까 저는 참 고맙다. 거리감이 없어진다. 어떤 사람은 동지라고도 불러주는데(웃음). 변호사가 전문직이라고 꼭 우대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 직군에 따라서 기여할 수 있으면 된다. 오히려 스스럼없이 친해지면 속내들을 다 보게 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거다. ‘왜 거리의 변호사라고 불러줄까?’ 일종의 신뢰다. ‘저 사람은 그래도 나를 신뢰감을 갖고 보는 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을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게 기본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바는 무엇일까, 또 무엇을 남겨야 할까를 생각해보면 신뢰더라. 운동을 결과물로 생각하면, 그 순간 지속정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굉장히 아픈 것들이.. 정파,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자꾸만 그런 분열이 많아진다. 그런 운동이 과연 제대로 된 운동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잘못된 거죠. 연대의 결과물이 더 갈라지는 것이라면.

운동이 지향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고, 그 힘은 신뢰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거리의 변호사’라고 하면, 그래도 나를 신뢰해주는 구나 싶다. 제가 지금까지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심리적으로 고통 받았다고 해도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왔다면 그래도 열심히 살아온 것 아닌가(웃음).”

– 지금껏 맡았던 사건들 중에 가장 까다로웠거나 힘들었던 것, 보람 있던 사건을 꼽아본다면.

“정리를 하려면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요 근래 사건으로는 쌍용차 정리해고 취소소송이 있다. 완전히 롤러코스터를 탔던 사건이다. 저는 항소심부터 합류했는데, 변론 과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결국 1심(패소)을 뒤집었는데,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대법원이 사실관계에 대한 것마저 뒤집는 걸 보면서… 그때 ‘사법 정의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썼다. 더 이상 법원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법원 구성을 바꾸지 못하고, 그 사람들의 선의에 기댄다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확 들더라.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하는 대법관들이 과연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친화적일까? 그들의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들으려고 할까? 불가능한 얘기다.

6월 25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온 이주노조 사건도 진행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법률원 나오기 전에, 2005년 5월 시작한 걸로 기억하는데… 10년이 흘렀다. 그건 또 혼자 했는데, 매우 자존심이 걸렸던 사건이었다. 노동변호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노동부와 싸워서 지면 안 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상당히 갖고 있었다. 꼭 한 번, 대법원까지 승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참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워낙 시간이 길어져서… 이 사건이 거의 8년 동안 대법원 캐비닛에 처박혀 있었잖아요. 나중에는 의욕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고법까지 진행하면서 굉장히 치열하게 고민했다. 

앞쪽으로 돌아가면, 2002년에 발전노조 파업 사건을 맡았다. 형사랑 민사사건을 다 혼자 감당했다. 그때도 민사는 손해배상소송이 몇 백억 원씩 걸리고 했는데, 다 손해 없음을 입증해서 (원고 청구를) 기각시켰다. 또 노조집행부들 형사재판도 집행유예가 나왔다. 발전노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하나가 됐죠. 인기도 좋았다(웃음). 그때 노조가 전국에 흩어져있는데, 파업 기간은 38일이니까 정부는 블랙아웃이 일어날까봐 빨리 복귀시키려고 전전긍긍했다. 매일 전국에서 조합원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런데 인천, 삼천포, 하동, 강릉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데 제가 홍길동이 아니니까 전부 접견을 갈 수는 없죠. 그래서 고안해낸 게 전화 접견이었다. 경찰한테 전화해서 변호인임을 밝히고 체포에 항의하고, 수사외적인 것에 항의하고. 경찰이 (체포된 조합원들은) 업무복귀서에 강제날인하도록 해서 강제복귀시키기도 했는데, 당연히 월권이었다.”

– 변호사 생활을 하며 위기는 없었나.

“기억은 잘 안 나는데(웃음). 흥국생명 정리해고 사건을 법률원 시절 시작했다. 당시 흥국생명이 흑자였는데도, 미래의 경영상 위기에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며 정리해고 사유가 인정됐다. 그때 심적 열패감이 굉장히 컸다. 이 사건이 미래 경영상 위기에 대응할 필요성이 있을 때 정리해고가 필요하다고 본 최초의 판례는 아니었는데… 또 1심 재판장이 퇴임하고 나서 바로 사용자쪽 법률 대리인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이 퇴임하기 전까지 사건 진행이 참 안 된 걸로 기억나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사건에 들어왔을 때… 그런 일들도 있고 해서 여러 모로 힘들었다.”

– 어떤 변호사로 기억되고 싶은가. 정계 진출에 뜻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변호사가 될 때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민주노총 법률원장과 민변 노동위원장. 둘 다 했다(웃음). 그래서 어떤 변호사로 기억될까는 생각해본 적이 사실 없다. 그냥 변호사법 1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 그런 변호사로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게 제 꿈이다.

그런데 사법의 한계, 현실의 한계 이런 얘기들을 (인터뷰 내내) 했잖아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결국 권력의 문제다. 그 권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 자본… 이 권력의 관계를바꾸고, 후퇴를 되돌릴 수 있을까? 대중운동으로 뒤집어엎을 수 있을까? 저는 매우 힘들다고 본다. 그래서 보다 정치적인 모색들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정치세력을 어떻게 바꿀까? ‘우리의 현실은 불의하다, 이 현실을 그냥 둘 수 없다, 절망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해야 한다.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도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다 폭 넓은 정치세력의 규합에 기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좀 더 유력한 정당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들이 제 고민이다. 정계 진출이라고 하면, 보동 국회의원 이야기인데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일부다.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결국 문제는 완전히 기울어진 힘의 관계를 균형있게 만들거나 다시 뒤집느냐는 것이다. 그 과정에 정계 진출이 필요하다면 고민해야 하는 거고, 아니면 우리 세력을 더 결집시키고 더 크게 만드는 방법은 뭘까, 거기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도 싶다. 여전히 뭐랄까… 아직 무지하기 때문에 (웃음_ 고민을 하고 있다.“

– 법률사무소 이름이 ‘해우’다. 무슨 뜻인가.

“‘해우소(解憂所, 사찰에 딸린 화장실)’에서 왔다. 어릴 때는 절을 무척 두려워했는데, 나이 드니까 절이 주는 편안함이 있더라. 그래서 절에 가면 해우소를 보죠. 그런데 이름이 너무 좋더라. ‘근심을 풀어준다.’ 그만큼 좋은 게 어딜까 싶어서 사무실 이름을 ‘해우’로 하자고 생각했다(웃음). 사람들의 근심을 풀고 싶다는 생각에서 붙이긴 했죠. 그런데 근심이 풀리는 게 아니라 더 쌓이는 것 같아서 문제다. 고민이다. 사람들이 자꾸만 고립되고, 앙상해지잖아요. 갈수록 지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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