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기자라면

어쨌든 한 번은 보려했던 책. 급휴가 덕에 완독했는데 기자가 쓴 책이고, 취재기 중심으로 스토리가 이어져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편이다.

‘힘 있는 단독’은 기자라면 누구나 한 번 꿈꿔보는데, 그만큼 어렵다. 세상을 바꾸긴커녕 기레기라 손가락질 당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 자위하며 살아가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 터진 국정농단사건은 아마 많은 기자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을 거다. 나만 해도, 육아휴직기에 모처럼 뉴스를 챙겨보며 ‘도대체 저건 어떻게 취재했을까’ 혼잣말을 내뱉은 적이 몇 번이었으니까.

아무튼 대단한 특종은 쉽게 오질 않는다.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면 제법 운 좋은 기자생활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면에선 ‘실력 있는 기자’라고 불릴 만하다. 진승현 게이트, 안기부 불법도청 사건 등 대형 보도를 몇 차례나 해봤으니.

하지만 그런 ‘실력 있는 기자’ 타이틀 뒤를 생각 안 해볼 수 없다. 꼭 특종을 위해서만인가. 일이라는 건 결국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다. 출퇴근거리가 길어지고 식구가 늘어나니 한때 일욕심을 앞세웠던 나도 요즘엔 하루하루가 어렵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어쨌든 배울 점이 있고, 지나친 ‘기자정신’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책이었다. 역시 적절한 힘빼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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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문제는 기사로 다룰 수 있느냐 여부였다. ‘아는 것’과 ‘쓰는 건’ 다르다. 이걸 기사로 쓰려면 뒷받침되는 팩트를 확인하고, 증언을 확보해야 했다. 취재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CCTV 영상과 김종의 문자메시지 이 2개만이 확인된 팩트였고, 나머진 고영태의 증언뿐이다. 고영태에게서 받은 문건들도 출처를 확인해야만 기사가 가능할 듯싶었다.

45쪽) 기자라면 최적의 시점, ‘시의성’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다.

46쪽) “기사는 타이밍의 예술이다.” …. 시의성이 없는 기사는 자칫 허공만 울리는 메아리로 끝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의성이 외부적 환경을 의미한다면, 타이밍은 취재할 수 있는 환경과 실제 취재가 가능한 상황까지 전부 포함한 얘기다. 밤잠 안 자고 열심히 취재한다고 해서 취재가 되는 건 아니다. 완성된 기사의 보도시점도 중요하지만, 취재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 기사가 먹히는 외부적 환경 외에 이런 3박자(취재역량, 취재 가능한 범위, 보도할 각오와 결속)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거대 권력을 고발하는 기사를 던졌다간 자칫 맥없이 사그라들거나 오히려 ‘역풍’에 직면할 수도 있다. 2014년말 세계일보의 ‘비선실세 정윤회의 국정개입’ 보도가 그랬다.

49쪽) 박관천의 석방은 무엇보다 그동안 1년 넘게 묵혀두고 있던, 청와대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되는 최순실 문건을 확인해줄 수 있는 취재원이 생겼다는 뜻이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 취재 당시 상황과 비슷했다. 그때도 취재 1년여 전 단순 금융비리 사건읋 덮일 때 구속됐던 전 국정원 직원과 브로커 김모씨 등 2명이 풀려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두 사람의 입을 열어 진승현 게이트 취재를 풀어낸 적이 있었다.

52쪽) 굴지의 그룹들이 500억 원 가까운 돈을 내 ‘문화사업’을 한다는 건 평소 같으면 상당한 홍보감인데도 기사 한 줄 찾기 어려웠다. … 전경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도자료를 찾아 훑었다. 사업 내용도 구체화된 게 없었다. 일단 컴퓨터 취재 목록에 ‘미르’를 만들어 전경련 보도자료와 함께 한국경제 사진기사 파일을 넣어뒀다. 그리고 보도자료와 현판식 사진에 나온 이사진들 한 명 한 명 인터넷에서 검색해 각각의 프로필과 따로 찾은 기사들을 저장해뒀다.

70쪽) 최순실을 끄집어내면 곧이어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최순실은 목에 걸리기 쉬운 큰 떡이었다. 큰 떡을 먹기 편하게 잘게 썰거나 부드럽게 만들어 접근하는 전략을 펴야 했다.

최순실이 등장하기 전에 먼저 최순실의 하수인이나 최순실이 만들어낸 농단의 결과로 빚어진 사안들부터 하나씩 보도하는 것으로 구도를 잡았다. 고발할 대상들 주변에 그물을 쳐가면서, 마지막에 ‘이 모든 근원이 최순실이었다’는 식으로 풀어낼 계획이었다. 그래서 의상실 CCTV영상은 후반부에 나와야 했다.

88쪽)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을 알리는 첫 기사는 이렇게 박태환(2016. 7. 6보도)에서부터 시작됐다. 눈치 채지 못하게 야금야금 전진해서, 결국엔 ‘최순실 게이트’라는 틀로 묶는 전략이었다.

111쪽) 먼저 2014년에 안종범과 차은택이 UAE를 다녀온 사실이 있는지부터 확인이 되어야 했다. 대한항공에 있는 지인을 통해 2014년 8월 안종범이 UAE를 다녀왔는지 확인을 요청해봤으나 “승객 정보라 알려주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 당시 경제수석이 현지에 떴다면 UAE나 중동에 나가 있는 코트라나 외교 공관에 비상이 걸렸을 걸로 보여 서주민에게 전화로 직접 현지 취재를 해보라고 시켰다.

“안종범이 온 적 있느냐? 없느냐?”로 묻지 말고, ‘안종범 수석이 왔을 때 외교 공관에서 수행을 했는지 안 했는지’로 물어보라고 했다. 알고 싶은 내용을 전제로 슬쩍 깔고 그 다음 단계가 궁금한 듯 물어보는 질문 스킬이다. 서주민이 현지 외교관계자와 그런 식으로 통화를 하자 금세 넘어왔다.

120쪽) 6월 말, 하루는 박성제 뒤로 지나가다 책상에서 ‘미르재단 출연 및 출연가액’이라는 표를 발견했다. … 국세청에서 공개하는 공익법인 공시사항이었다. 그런 게 공개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박성제는 너무 당연해서인지 혼자 갖고 있었다. 이처럼 외롭게 떨어져 있는 정보들을 모아서 가끔씩 공유시켜줘야만 ‘헛심’ 쓰는 일을 방지할 수 있었다.

137쪽) 지쳐 나가떨어지는 후배들을 채찍질하면서 자주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몰라서 못 쓰는 건 괜찮다. 그런데 알고 못 쓰면 무능한 기자고, 알고도 안 쓰면 직무유기다.” 사실은 나를 다잡는 자기최면이었다.

141쪽) 요리 한류 관련 질문으로 포장하면서, 실제 취재와 필요한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끼워 넣는 계획이었다. 요리학교는 사실 미끼였고, 미르재단 취재가 속셈이었다. 의심 사지 읺고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질문을 구성해 이재중에게 넘겨줬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앞에는 유인용 질문을 배치하고, 뒤로 가면서 알고 싶은 내용을 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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