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분의 1이 된 나를 위하여

페북 ‘과거의 오늘’ 기능을 좋아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잊고 있던 1년 전, 2년 전 이맘때 아이 모습을 볼 수 있어서다. 기록 없는 기억은 약하다. 매일 봐도 하룻밤이 지나면 또 자라는 게 아이들이라 과거는 자꾸 흐려져간다.

이 ‘과거의 오늘’을 읽어가다보면, 과거의 헛소리(?)도 복기할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과 맥락으로 썼는지 모를 이야기들말이다. 수많은 알코올 분자 덕에 쪼그라든 뇌세포를 탓하고 싶지만, 그 이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어설프고 뜬금없는 기억은 지워버리는 게 낫다.

며칠 전에는 2011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쓴 글을 봤다. ‘왜 하늘은 날 합격시키지 않느냐’고 수없이 탄식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여기엔 ‘기자란 직업에 환상은 없지만’란 표현이 있었다. 7년이 지난 후에도 이 생각은 굳건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고지식한 사람이고, 어떤 면에서 저 ‘환상없음’은 나의 고지식함이 일종의 초심처럼 유지되고 있는 부분이다. 하여 기자란 직업에 환상이 없는 나는, 이 일을 일로써 잘하고 싶은 편이라 크고작은 불만들을 꾸준히 쌓아왔다. 그리고 그 화살은 대개 밖을 향해 있었다.

지금은 안도 함께 겨누고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지만, 몇 년 전 기자협회보에서 어느 선배가 조직을 비판하는 자신에게 ‘너도 이제는 n분의 1만큼 책임이 있다’고 했다던 짧은 글 한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 요즘엔 더 자주 생각난다.

괜히 이것저것 들춰보기도 했다. 당연히 답은 없었고, 답답함이 남았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란 책도 넘겨봤다.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을 재어가며 앉은 자리에서 완독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속으로 수없이 ‘맞아, 맞아’ 호들갑을 떨면서.

동시에 점점 차분해졌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욕구를, 창조하고픈 욕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일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10쪽)”인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욕구의 10%라도 채울 수 있을까. 불만을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행동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정확히.아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직업의 세계에서 일상을 떠받치는 것은 “일의 리얼리티(56쪽)”다. 이상은 연료가 될 순 있어도, 약간 젖은 땔감과 비슷하다. 불을 제대로 붙이기엔 부족하다. 그렇다면 판단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불을 붙일 수 있을까. 땔감을 바꾸거나 바짝 말리거나.

결국 일도 일 자체와, 일을 둘러싼 다른 요소들과 나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일의 리얼리티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있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

“좋아하는 일을 이상화하며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그 모든 변화를 놓칠 수 있다. 결국 좋아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는 일이라 착각하며 유통기한 끝난 열정을 쏟아붓기도 한다(59쪽).”

“모두가 ‘주관적 만족감’만 좇아 놀듯이 일하는 데만 집중한다면 일이 현실 사회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소수의 결정권자 손으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누군가 대신 설정해놓은 과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놀듯이 즐겁게’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128쪽).”

어쨌든, 아직까지는 나는 운 좋게도 만족감을 좇아 택한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 당연히 10점 만점에 10점은 아니지만 10발을 쏠 때 절반 정도는 방아쇠를 직접 당길 수 있는 조건이라 생각한다. 열정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유효하다. 이것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더 갈고닦느냐는 내 일의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 혼자는 안 된다’ 믿음이 점점 강해진다. 나 혼자만 하면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과로 이어지기도 힘들다. 일이라는 것이 더 이상 완벽한 자아실현의 도구도, 안전한 생계수단도 못 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그것을 잘하고 싶은 조건을 찾는다면… <내리막세상…>은 현재 내가 내린 결론이 틀리진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스토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가 물을 것은 ‘내 옆에 누가 있는가’다. 그리하여 ‘나’가 아니라 ‘우리’가 이 모든 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발견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함께하는 손이 있을 때야 비로소 시시포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178쪽).”

49쪽)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싫은 것은 대개 일 자체라기보다 일이 놓인 조건이다. 그저 싫다, 괴롭다 토로하는 대신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무엇이든 하나씩 지금과는 ‘다르게’ 해보아야 비로소 실마리가 드러난다.

53쪽) 어떤 분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됐다면, 그 관성은 가벼이 볼 만한 것이 아니다. 그의 관성은 마구잡이로 돈벌이를 하며 일을 때우는 종류의 관성이 아니다. … 나는 정영목의 선택이 자신의 호불호와 현실 사이의 냉정한 타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관성’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그 관성이 “번역할 책을 제가 고를 수 있는 위치”로 그를 데려다주었다. … 때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그 일이 제 가슴을 뛰게해요”라는 이유보다 훨씬 오래가는 동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일은 일상을 이우려, 일상의 매 순간 뛰는 가슴만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오래가는 동력은 결국 어떤 일을 ‘잘’할 수 있게 만들어주며, 잘한다는 것은 똑같은 일을 훨씬 더 좋아할 수 있는 조건을 선사한다.

75쪽) 무엇이 진짜 나의 얼굴인지, 온전한 나인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 가면들이 결국은 모두 나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중에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은 없다. … 역할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얼굴을 꺼내 보이는 것은 어른스러운 일이다. “나는 원래 이래” 또는 “나는 솔직한 사람이야” 같은 말로 자기의 ‘진짜’ 얼굴만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일이 아닐까.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한다고 해서 진정성을 내팽개치는 것도 아니다. 성숙한 진정성은 자신의 성격이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하고 있는 일의 목표와 가치를 스스로 얼마나 믿고 있느냐로 진정성은 판가름 난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내가 슬픔을 느꼈던 것은 내가 보이는 얼굴이 가면에 불과해서가 아니었다. 그 가면을 써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 적절한 거리를 두고 일과 환경을 바라볼 때만 우리는 기꺼이 가면을 쑬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쓸데없이 상처를 받지도 주지도 않으며,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적절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 보여야 했던 얼굴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위에서 시켜서’ 혹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같은 말 뒤에 숨는 것이 차라리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자기연민은 현실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쓸 수 있는 가면이었다면 아무리 불편했다 해도 내 얼굴 중 하나였던 셈이다.

175쪽) 윤리적 의미만으로는 바짝 당겨지기만 하던 활시위가 끊어져버릴지 모른다. 성공의 희망만으로 산다면 자신의 믿음에 배신당할 위험이 있다. 성장의 기쁨만으로 산다면 어느 순간 허무감에 빠질 수도, 손쉽게 회사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의미도, 희망도 필요하며, 하루하루를 채우는 순전한 즐거움도 필요하다. … 이 세 가지 요소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동료’의 존재다. …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이 내 돌을 잠깐 멈춰 세워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손이다. 개인으로선 불가피한 일이 집단에겐 꼭 그렇지 않다. 개인의 한계와 집단의 가능성, 그 둘 사이의 격차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어려울 수도 쉬울 수도 있다.

218쪽) 말해지지 않은, 그러나 얼굴 위에 고스란히 쌓여가는 일의 괴로움이 클수록 우리는 일하는 이유를 일의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가 희생을 과장하면서 희생을 인정받기 위해 안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비애, 어머니의 피로, 아이들의 고단함. 모두가 자신의 희생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부르짖는다. 그 괴로움이 희생으로서 의미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동이 의미를 잃을 것이므로. … 직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괴로움을 투입하는 만큼 인정받는다. … 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업무에 한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 수많은 상황 변수가 작용하여 잘한 일에도, 못한 일에도 핑계는 수만 가지다. 상황이 이러니 일의 결과를 따져서 ‘공정히’ 보상하는 것은 시작부터 실패하기 십상이다. 결국 일의 아웃풋이 아니라 인풋을 따지게 된다. 쉽게 드러나는 일의 인풋은 버티고 앉아 있는 시간이요, 일에 들이는 ‘괴로움’이다. …. 보여주기 위해 쓸데없이 만들어내는 일이 난무한다. 일종의 군비경쟁인 셈이다.

256쪽) 그리하여 다르게 살고자 한다면 결국 더 유능해야 한다. 이것이 흔한 자기 계발서의 주문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유능의 준거가 세상의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유능해야 할 이유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한다. …. 이 책에서 나는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다르게’ 유능할지 고민해볼 수 있기를 바랐다. 개인의 차원에서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사회가 우리의 능력을 재단하는 기준을 되짚는 것까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혼자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해답을 찾아보는 것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을 시작한 지 15년째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일을 고민하는 나 자신을 위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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