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판

몇 년 동안 법조 출입을 하며 가장 기억 남는 장면은 원세훈의 법정구속도, 이병헌과 탑의 4번 출구 입장도 아니다.

다른 재판을 보러 조금 일찍 들어간 형사법정이었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수많은 사건의 판결문이 쌓여있었고, 재판장은 짧게 판결요지를 읽은 뒤 주문을 낭독하기 바빴다. 그 기계적인 장면 속에서, 그 피고인이 무슨 죗값을 치르는지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나는 돌이 채 안 됐을 아기를 등에 업고, 쉴새없이 재잘대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방청석 맨뒷자리에 앉은 여성만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을 뿐이다.

작달막한 키, 왜소한 체구의 그 피고인은 선고 내내 고개를 잘 들지못했다. 재판장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0년에 처한다”고 했다. 피해자와 합의를 위해 공탁금 몇 천만 원을 냈고,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짦은 설명이 깎아진 5년을 대신하고 있었다. 선고가 끝났다. 갑자기 뒤편에서 큰소리가 났다.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붙잡고 있던 그 여인이었다. 아이들 때문인지 제자리에 앉은 채로, 그는 “저 사람은 우리한테 사과도 안 했고, 달라진 것도 없는데 왜 감형해주냐”고 재판부에게 항의했다. 피해자였다. 지극히 평범해보이던 중년남성은, ‘층간소음’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사건으로 사람의 목숨을 뺏고 한 순간에 범죄자로 전락한 이였고, 두 아이 엄마는 피해자의 부인이었다. 그는 공탁금도 필요없다며 양형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재판은 사적 복수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던 재판장이 말했다. 뒷이야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판사의 고압적인 말투에 놀라기도, 저 말 자체에 놀라기도, 그러면서 저 말 자체가 맞는다는 사실에 씁쓸하기도 했던 느낌만 남아있다. 그 사이 법정은 정리됐고, 나는 원래 보기로 한 다음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큰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서 들려왔다.

복도로 나갔다. 여인이 울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큰아이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재잘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쩌지, 어쩌지만 반복하다 다시 법정으로 돌아왔다. 기사를 써야하는 재판이라 챙겨야 했다. 절반짜리 핑계였다.

가끔 그날 그 복도가 떠오른다. 오늘 아래 링크한 글을 읽어보니 잊었다가도 불현듯 그날 그 복도로 기억이 소환되는 까닭을 알겠다.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날 ‘괜찮아요?’라는 말 한 마디조차 건네지 못한 채 쭈뼛쭈뼛 지켜보다 결국 그들을 지나친 나를 후회한다. 어설픈 원칙주의자는 늘 이렇다. ‘괜찮냐’는 말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나는 일어선 채로 그 말을 들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선고가 끝나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형식적인 반응뿐이었다. 나중에 돌아오면서 “어찌 되었건 어머님이 속이 많이 상하셨겠네요”라는 말 한마디할 것을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그 아주머니가 가고 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피고인 어머니가 법대 앞으로 다가왔다.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면서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아 머리를 한껏 숙이셨다. 자기 아들이 구속될 줄 알았는데 집행유예로 나오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사실 집행유예도 유죄 판결이므로 내심 나는 젊은 아들을 전과자로 만든 것 자체가 미안했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드님이 인물이 좋던데 결국 잘될 겁니다”라고 했다. 그 역시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마음고생 많으셨겠습니다”라는 말부터 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가 됐다.

그로부터 한 주 전에는 마약범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피고인의 어머니가 내게 아들을 풀어달라며 면담 신청을 했다. 이미 끝난 사건에 판사가 당사자를 만나면 오해와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통례에 따라 거부했다. 그 어머니는 그 추운 날씨에 세 시간 동안 법원 문 앞에서 울다 가셨다고 들었다. ‘그때 몸을 사리지 말고 그냥 법정으로 불러 말씀이나 들어드릴걸’ 하는 후회도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다.

– 정재민, 선고일 법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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