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가 남긴 것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생 속으로>를 읽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알래스카 숲속으로 향했던 청년, 크리스 맥켄들리스의 순수하고 무모한 열정을 다룬 책이다. 이번에도 존 크라카우어(저자)는 옳았다.

지상낙원이 무엇인지, 어디인지는 저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다. 크리스에게 그곳은 두 손과 두 발로 온전히 모든 것을 이룩하는 야생이었다. 덴마크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서있는 곳이다.

코펜하겐 킹스 뉴플라자, 바로 앞에 덴마크 왕립극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발길 닿은 공간마다 유색인종은 드물었고,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노숙자는 오래된 건물 층계참에 칼스버그 맥주사 로고가 큼직하게 새겨진 담요를 덮은 채로 잤다. 일행 중 한 분은 복지국가라더니, 몇몇 건물은 장애인 접근성이 떨어지고 인도에 점자블록조차 없다며 놀랐다. 중학교 졸업 후 다양한 인생의 경로를 탐색 중인 덴마크 학생들은 여러가지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제대로 선택해야 할지가 큰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많은 덴마크인들이 이 나라를 행복국가라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짐작하는 비결은, 몸이다.

우중충한 날씨에도 밖에서 뛰어놀던 아이들. 낯선 동양인들이 흥미로웠는지 한참을 따라다녔다.

반도의 작은 땅에서 온 어른들은 만 15~16세 덴마크 청소년들에게 매번 여가시간에 뭘하냐 물었다. 십중팔구가 운동이라고 답했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멋쩍게 웃으며 친구들과 술을 마신다는 금발의 소년이었다(덴마크는 15세부터 술과 담배를 구입할 수 있다).

400개의 섬으로 이뤄진 덴마크에선 볕이 귀하다. 6일만에 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흐리거나 종일 비가 내리는 날들이 일상이다. 그리고 그런 날에도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논다. 어른들은 우산조차 쓰지 않고 다닌다. 공원을 뛰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움직인다. 마지막 아침 산책길, 햇빛이 내리쬐는 호숫가에는 달리기를 하거나 반려동물과 함께 걷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몸을 움직이는 데에 여전히 낯설다. 돌봄목적이든 입시를 위해서든 학교 끝나고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학원을 전전하느라 바쁜 아이들이 매일 5km씩 자전거로 통학할 수 있을까. 틈나는 대로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운동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 잊어가는 몸의 기억이 날이 갈수록 아이들의 얼굴을 딱딱하고 무심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움직이지 않는 삶은 아이들의 표정만 앗아가지 않는다. 어쩌면 더 비참해지는 쪽은 어른들이다. 나이듦은 곧 표정이 사라져가는 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셀카모드로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던 나는 서둘러 카메라창을 닫았다. 빛의 각도와 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순간을 계산해 ‘이때다’하고 셔터를 누르던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겐 너무 낯선 존재다. 누군가 찍어준 사진 속의 나 역시 표정이 단조롭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른바 ‘외쿡미소’는 살아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온전히 누리는 자유에서 우러나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자유의 시간에 나는 매번 움직였다. 너비 30cm 정도 책상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다 전화 취재를 하거나 밥 때를 핑계삼아 움직이는 일상으로부터 제법 멀찍이 온 덕분이었다.

코펜하겐의 밤. 술 좋아하고 담배 좋아하는 덴마크 사람들은 겨울에도 노상카페(면서 주점)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멀리 보이는 빨간색 불빛이 그 비결, 온열기다. 처음에는 ‘역시 북유럽은 다르구나’했다는…

덴마크에서 돌아온 뒤 설을 쇠러 제주도 시댁에 갔다. 아침부터 연이은 차례와 세배 폭풍이 지나간 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난 아이들은 심심하다고 재잘댔다. 셋이 손을 꼭 잡고 거센 섬바람을 헤치고 동네 놀이터에 도착했다.두 시간 가까이 뛰었다. 잡기놀이, 발레놀이, 신데렐라놀이에 식당놀이까지… 아이들은 지칠 줄 몰랐다.

섬(덴마크)과 섬(제주도)를 오간 2주가 남긴 가장 반짝이는 순간은, 이때 같다. 행복한 나라에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던 삶의 방식을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은 인생의 다양한 장면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자. 크리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은 누군가와 함께 할 때가 진짜(Happiness is only real, when shared)’라고.

많은 여행객들이 행복을 나누는 뉘하운 운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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